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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엄마, 우리엄마,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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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어느 날...
나는 전기도 안 들어오는 강원도 산골짝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5살 정도쯤 되었을 때 그나마 전기가 들어오는 아래 동내로 내려와서 살게 되었다.
우리 집 아래 에는 고모부 고모가 사셨고
또 그 옆에는 아버지의 친척 분들이 사셨다.
한마디로 이 씨 집성촌이었다.
내 어릴 적은 정말 버라이어티 했다.
고모네 4번째 누나랑 한 겨울에 처마 밑에 달린 고드름으로 칼싸움하다 누나 볼을 찔러서 피가 나게 하고
누나랑 감자, 고구마, 옥수수 등을 불에 구워 먹었는데 설익어서 배탈도 나고 숫 껌댕이를 먹어서 입이 시켜 멋 개 되기도 했었다.
하루는 친척 누나들이 강가에서 빨래하는데 근처에서 뛰어놀다 물에 빠진 나를 
 손을 물속으로 쑥 집어넣어 물에 빠진 날 건져 준 적도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두 누나는 수영 선수로 활동 할 정도 옅다. 
고모부가 농사를 지으셨는데 뱀을 잡아 드럼통에다 넣어 모아 놨는데 나는 그 드럼통에 쑥대를 집어넣고 뱀이 그 쑥대를 타고 올라오면 중간 정도 왔을 때 쓰윽 빼서 다시 떨어트리고 놀곤 했었다.
또 고모부는 배터리를 이용해 고기를 기절시켜서 잡는 사람들 이있었지만
집에 두꺼비 집에다 전선을 연결해 강가까지 깔고 거기서 전기로 기절시키는 방법으로 고기를 잡곤 하셨다. 이것도 커서 고모부 돌아가시고 들은 이야기이다.
그때는 우리 집에 텔레비전이 없어서 고모네 집에 가서 저녁쯤 스머프를 보고 집으로 올라오곤 했다. 고모네 와 우리 집은 50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렇게 5살이 되던 해 우리 집 화장실이 두 개가 있었다 하나는 집 안마당 안쪽에 또 하난 집밖에 그런데 어느 날부턴가 화장실 벽에 피가 보이기 시작했다.
어려서 기억은 잘나질 않지만.
우리 집은 황토로 벽을 만든 집이었는데.
화장실 황토벽에 뻘건 게 묻어 있었던 게 기억이 난다.
아버지가 편찮으셨던 거였다.
어머니가 읍내에 가서 약을 지어 와도 드시질 않고 술만 드시고...
그때는 병원의 문턱이 그렇게 낮지가 않을 때였다.
그래서인지 아버지는 약과 치료 대신 죽음을 선택하신 듯하다.
그렇게 아버님이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가셨고 그때의 장사는 시신을 병풍 뒤에 모시고 하루 이틀 장례를 치른 뒤 선산에다 묻는 형태였었다.
물론 우리 아버님도 그렇게 땅속에 묻히게 되었다.
그리고 1년 뒤 어머니는 시골에서 농사로 나와 여동생을 키울 수 없으셨기에 우리 둘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오시게 되었다.
그때가 6살 한겨울 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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